하순봉 작곡가
파블로 카잘스(1876~1973). 스페인의 첼리스트로 흔히 ‘음악의 성자’로 불린다. 베토벤만 악성으로 불렸을 뿐 그 어떤 작곡가도, 음악가도 얻지 못한 별명이다. 특히 연주가들에겐 전례가 거의 없다.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카잘스는 왜 이런 호칭을 얻게 되었을까? 그는 96세까지 장수했고 20세기 초중반에 주로 활동했다. 초일류의 연주자로도 뛰어났지만, 음악에서 그의 업적은 첼로라는 악기의 새로운 자리매김이었다. 19세기만 해도 첼로는 관현악에서 주로 저음역을 담당하다 보니 역할이나 주법이 지금보다는 많이 소극적인 편이었다. 그런 첼로의 다양한 주법을 개발하고 첼로의 위상을 올려놓은 공로가 가장 크다. 그 외에 당시 최고의 위치에 있던 쟈크 티보, 알프레도 코르토와 함께 ‘카잘스 트리오’를 결성해 활동한 것도 전설이 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명한 일화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에 대한 것이다. 사실 이 곡의 존재는 잊혔다기보다는, 약간은 첼로의 연습곡 정도로 폄하되어 있었던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카잘스의 공로는 자칫 하찮게 여겨질 뻔한 이 작품의 가치를 알고 재발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곡은 ‘첼로의 구약성서’라 불린다.
사실 13세의 카잘스가 이 곡을 고서점에서 발견한 것은 운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멘델스존이 바흐의 마태수난곡 악보를 만난 일화와 흡사하다. 이 조숙한 소년은 이 곡의 범상치 않음을 알아보고 무려 12년간 공부해 25세에 전 곡을 연주하게 된다. 총 6곡으로 된 이 모음곡이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된 것도 이런 카잘스의 연구와 수정이 큰 역할을 했다. 이 음악 전곡 녹음을 결심한 것도 60세였다고 하니, 그가 이 작품을 어떻게 대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음악적인 업적 외에 그의 이름과 함께 늘 언급되는 단어는 ‘스페인 내전’이다.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난 이름도 같은 화가 피카소의 대표작 ‘게르니카’, 본인이 종군기자로 참여했던 경험으로 쓴 소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 스페인 내전은 많은 예술가와 관련이 있다. 카잘스도 이 스페인 내전과 정면으로 부딪친다. 그는 스페인 중에서도 카탈루냐 출생이다. 카탈루냐는 고유의 언어가 있고 문화적 자부심이 강한 지역인데 내전으로 강한 탄압을 받게 된다. 카잘스는 연주 거부 선언을 하면서 무언의 항거를 하다 결국 망명을 하게 된다. 이후 그는 카탈루냐 독립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1950년 프라드 음악제에서 바흐 서거 200주년 기념 음악회로 다시 활을 잡게 되지만 그의 마음은 더욱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항상 공연의 끝에 고향의 민요인 ‘새의 노래’를 연주하는 걸로 유명했다. 평소 그는 베레모를 즐겨 쓰고 다녔는데, 이 베레모는 피레네산맥의 예술가와 노동자들이 즐겨 쓰던 모자였다. 그가 얼마나 고향을 사랑하고 자긍심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이런 국제적인 위상에 힘입어 그는 95세에 유엔 평화 메달을 수상하게 된다. 스페인 정부는 카잘스 사후 50주년 기념 주화도 발행했고, 카탈루냐 자치정부에서도 기념 지폐를 발행했다. 카잘스의 위상은 첼리스트를 넘어섰다.
카잘스는 90대의 나이에도 매일 경전을 읽듯 바흐를 연습했다고 한다. 그의 조국에 대한 사랑 인류애, 그리고 음악가로서 구도자적인 삶을 산 그에게 우리는 잃어버린 순례자나 성자의 모습을 찾으려 했는지 모른다. 올해는 그의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 많은 행사로 그를 기억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예측 불가의 인공지능 시대를 사는 오늘의 현대인들에게 카잘스는 그래도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인간의 존엄함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